뉴욕 클로이스터스 미술관 전시실 깊숙한 곳에서 정교하게 펼쳐진 중세 채색 필사본과 성유물함을 만났습니다. 차가운 겨울 공기를 뒤로하고 들어선 보물실 안에는 손바닥에 들어올 만큼 작은 성인상과 정교한 상아 조각, 그리고 책장을 가까이 들여다봐야 비로소 보이는 세밀한 그림들이 유리 진열장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겨울 오후, 중세의 보물실로 들어가다
고요한 겨울날의 클로이스터스 미술관을 다시 찾았습니다.
지난 3부에서 소개한 유니콘 태피스트리가 벽을 가득 채운 거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에는 중세 성유물함과 채색 필사본처럼 작고 정교한 작품들을 만났습니다.
손바닥에 들어올 만큼 작은 성인상과 상아 조각, 책장을 가까이 들여다봐야 보이는 세밀한 그림, 성당 건축을 축소한 듯한 성유물함이 유리 진열장 안에 놓여 있었어요.
크기는 작았지만 그 안에 들어간 시간과 정성은 결코 작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중세 사람들에게 손으로 써 내려간 중세 채색 필사본과 십자가, 성유물함은 감상만을 위한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읽고 기도하고 예식을 행하며 신앙을 가까이 느끼게 해주는 물건이었지요.
손으로 쓰고 금빛으로 밝힌 채색 필사본

유리 진열장 안에는 펼쳐진 중세 필사본이 여러 권 놓여 있었어요.
인쇄술이 널리 보급되기 전의 책은 글씨를 쓰는 일부터 그림을 그리고 장식하는 과정까지 모두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양피지 위에 글을 쓰고, 첫 글자를 크게 장식하고, 성서 이야기와 성인의 생애를 작은 그림으로 그려 넣었어요. 금박과 선명한 색이 더해진 페이지는 책이라기보다 작고 정교한 회화 작품처럼 보였습니다.
같은 내용의 책이라도 손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각각 다른 모습을 지닌다는 점도 특별해요. 더 메트는 채색 필사본을 대량 생산된 오늘날의 책과 달리 저마다 하나뿐인 수공예 작품으로 설명합니다.
하루의 기도 시간을 함께한 기도서
사진 속 책 가운데에는 성모와 성인,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 작은 기도서도 있었어요.
중세 후기에 널리 사용된 시간서(Book of Hours)는 성직자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개인이 정해진 시간에 기도할 때 펼쳐보던 책이었습니다.
이러한 개인용 기도서 역시 정교하게 제작된 중세 채색 필사본의 대표적인 형태였습니다. 기도문과 시편, 성모와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그림이 함께 실렸고, 소유자의 형편과 취향에 따라 장식의 화려함도 달라졌어요. 당시에는 널리 사랑받은 개인용 기도서였기 때문에 더 메트는 시간서를 ‘중세의 베스트셀러’라고 소개하기도 합니다.
작은 페이지 안에는 인물의 옷 주름과 표정, 꽃과 새까지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어요.
책장을 넘길 때마다 글을 읽는 일과 그림을 바라보는 일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이어졌을 것 같았습니다.
글자가 노래가 되던 중세의 악보
또 다른 필사본에는 네모난 음표가 여러 줄로 이어져 있었어요.
지금 사용하는 오선 악보와 모습은 다르지만, 글과 음악을 함께 기록하고 여러 사람이 같은 선율로 노래할 수 있도록 만든 악보였습니다.
페이지 가장자리에는 꽃과 잎, 작은 동물과 인물들이 그려져 있어요.
기도문을 기록한 글씨와 음악을 나타내는 기호, 그림 장식이 한 장 안에 함께 놓여 있다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중세의 책은 읽는 물건이면서 동시에 보고, 노래하고, 기도하는 물건이기도 했겠지요.
중세 성유물함은 무엇일까
필사본이 기도문과 성서 이야기를 담았다면, 중세 성유물함은 성인과 관련된 흔적을 간직하던 용기였어요.
성유물(relic)은 성인의 유골이나 신체 일부, 또는 성인이 사용하거나 접촉한 물건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보호하고 공경하기 위해 만든 용기가 성유물함(reliquary)이에요.
성유물함은 작은 상자부터 성당 모양, 인물상이나 신체 일부를 본뜬 형태까지 다양했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성유물을 통해 성인의 거룩함과 치유의 힘을 가까이 느낄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성유물함은 단순한 보관함이 아니었습니다.
귀한 금속과 보석, 에나멜과 세밀한 조각을 사용해 내부에 담긴 성유물의 의미를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으로 표현한 작품이었어요.
작은 고딕 성당처럼 펼쳐지는 성유물함

가장 오래 눈길을 붙잡았던 작품은 금빛 날개가 펼쳐진 성유물함이었어요.
사진 속 중세 성유물함은 금빛 날개를 펼치면 작은 고딕 성당처럼 보였어요.
프랑스 금속공예가 장 드 투일(Jean de Touyl)에게 귀속되는 작품으로, 1325년에서 1350년 무렵 파리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중앙에는 성모자와 천사가 자리하고, 양쪽 날개에는 성모와 아기 예수의 생애가 푸른빛 에나멜로 표현되어 있어요.
뾰족한 아치와 기둥, 지붕과 작은 조각은 고딕 성당의 구조를 축소해 놓은 듯합니다. 더 메트는 이 작품의 에나멜 장면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떠올리게 한다고 설명해요. 현재까지 남은 같은 유형의 성유물함도 매우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작품 안에 작은 성당 하나가 들어 있는 것 같았어요.
커다란 건축물을 바라볼 때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중세의 공간과 신앙을 만나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축복하는 손의 형태로 만든 성유물함

옆 진열장에는 팔과 손의 모습을 그대로 본뜬 성유물함도 있었어요.
이 작품은 1230년 무렵 뫼즈 계곡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나무로 형태를 만든 뒤 은과 금도금한 금속, 보석과 니엘로 장식으로 꾸몄습니다.
이런 팔 모양 성유물함에는 보통 성인의 팔뼈와 관련된 성유물을 보관했어요.
그러나 형태에는 보관 기능 이상의 의미도 담겨 있었습니다. 손은 축복하고, 병든 사람을 어루만지고, 기적을 행하는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에요.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는 금빛 손을 든 조각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용도와 의미를 알고 보니, 중세 사람들이 성인의 존재를 얼마나 구체적인 모습으로 가까이 느끼고 싶어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은빛 성인상에 담긴 긴 역사
손가락 길이만 한 작은 은빛 인물상 두 점도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어요.
한 사람은 왕관을 쓴 여성이고, 다른 한 사람은 주교의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두 조각은 독일 아헨의 금속공예가 한스 폰 로이틀링겐과 그의 공방이 1510년 무렵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원래는 리에주의 생 랑베르 대성당을 위해 만든 거대한 성인 흉상 성유물함에 부착되었던 조각으로 추정됩니다. 여성상의 상징물과 주교상의 지팡이가 사라져 정확한 인물은 확정하기 어렵지만, 작은 크기에도 옷 주름과 자세가 또렷하게 남아 있어요.
처음에는 독립된 작은 성인상으로만 보았어요.
하지만 원래 더 큰 성유물함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지금 남아 있는 조각 너머로 사라진 전체 모습까지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바다코끼리 상아에 새긴 클로이스터스 십자가
진열장 안의 밝은 색 십자가에는 작은 인물과 글자가 빈틈없이 새겨져 있었어요.
이 작품은 〈클로이스터스 십자가(The Cloisters Cross)〉로 불리며, 1150년에서 1160년 무렵 영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재료는 코끼리 상아가 아니라 바다코끼리 엄니예요.
십자가의 앞뒤와 네 끝부분에 성서의 인물과 장면, 글귀가 촘촘히 새겨져 있어 가까이 다가가야 비로소 세부가 보입니다.
화려한 색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밝은 상아빛 작품인데도 존재감은 무척 컸어요.
커다란 나무 십자가와 달리, 작은 조각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성서의 이야기를 읽도록 만들어진 작품처럼 느껴졌습니다.
손바닥만 한 상아에 새긴 성서 이야기
전시장에는 성모자상과 접이식 제단, 여러 성서 장면을 새긴 작은 상아 조각도 이어졌어요.
상아는 단단하면서도 표면을 섬세하게 다듬을 수 있어 중세의 개인 기도용 조각과 작은 제단에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사진 속 성모자상은 작은 건축 장식 안에 앉아 있고, 주변에는 더 작은 인물과 장면이 층층이 새겨져 있어요.
작품 앞에서 몸을 조금 숙이고 들여다보니 손가락보다 작은 얼굴과 옷 주름까지 표현되어 있더라고요.
멀리서 많은 사람이 함께 바라보는 성당 조각과 달리, 이런 작은 상아 작품은 가까운 거리에서 혼자 기도하며 바라보았을 것 같았어요.
읽고 바라보고 간직했던 믿음
아름다운 중세 채색 필사본과 성유물함, 십자가와 상아 조각은 재료도 형태도 모두 달랐습니다.
그러나 작품을 따라가다 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보였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신앙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고, 성인의 흔적을 아름다운 용기에 담고, 손에 잡히는 작은 조각으로 만들어 가까이 두었어요.
기도는 책이 되었고, 성유물함은 작은 성당이 되었으며, 십자가와 성모자상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새겨졌습니다.
당시에는 금빛이 아름답고 작은 조각들이 신기해서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사진과 공식 자료를 하나씩 맞춰보니, 그때 무심히 지나칠 뻔했던 작품들이 다시 말을 걸어오는 것 같습니다.
미술관을 나왔을 때 포트 트라이언 파크에는 겨울 해가 지고 있었어요.
책과 금속, 상아에 담긴 오래된 기도를 바라본 뒤 만난 노을이라서인지, 그날의 저녁빛도 조금 더 고요하게 기억됩니다.
📌 클로이스터스 4부 핵심 요약
손끝으로 밝힌 기도의 기록, 중세 채색 필사본
인쇄술이 없던 시절, 양피지 위에 손으로 글을 쓰고 금빛과 선명한 안료로 장식한 중세 채색 필사본과 개인용 기도서(시간서)는 단순한 책을 넘어 기도가 회화 예술로 승화된 수공예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보이지 않는 신앙을 담은 정교한 성유물함과 공예품
14세기 고딕 성당의 구조를 축소해 놓은 성유물함부터 축복의 의미를 담은 13세기 팔 모양 성유물함, 바다코끼리 엄니에 성서 이야기를 촘촘히 새긴 클로이스터스 십자가까지, 중세인들이 간직하고자 했던 숭고한 믿음의 흔적을 정교한 보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A
Q1. 채색 필사본은 무엇인가요?
인쇄술이 널리 보급되기 전, 양피지 등에 글을 손으로 쓰고 그림과 장식을 더해 만든 책이에요.
금박과 선명한 안료를 사용한 삽화, 장식 문자와 테두리 그림이 함께 들어가며, 모든 과정이 수작업이어서 각각 다른 모습을 지닙니다.
Q2. 시간서 또는 기도서는 어떤 책인가요?
시간서(Book of Hours)는 개인이 정해진 시간에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문과 시편, 성모와 그리스도의 생애 장면 등을 담은 책이에요.
중세 후기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소유자의 형편과 취향에 따라 크기와 장식이 달랐습니다.
Q3. 성유물과 성유물함은 어떻게 다른가요?
성유물은 성인의 유골이나 신체 일부, 성인이 사용했거나 접촉한 물건을 말해요.
성유물함은 그 성유물을 보관하고 공경하기 위해 만든 용기입니다. 상자, 성당, 인물 또는 신체 일부를 본뜬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어요.
Q4. 팔 모양 성유물함은 왜 사람의 팔을 본뜬 것인가요?
보관된 성유물이 성인의 팔뼈와 관련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에요.
또한 손은 축복하고 치유하며 기적을 행하는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팔과 손의 형태 자체에도 신앙적인 의미가 담겼습니다.
Q5. 클로이스터스 십자가는 무엇으로 만들었나요?
12세기 중엽 영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작품이며, 재료는 바다코끼리 엄니입니다.
십자가의 표면과 끝부분에는 성서의 인물과 장면, 글귀가 매우 세밀하게 새겨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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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기록 메모
- 계절: 겨울
- 장소: 미국 뉴욕 더 메트 클로이스터스 (The Met Cloisters)
- 위치: 포트 트라이언 파크
- 주요 작품: 중세 채색 필사본, 성유물함, 클로이스터스 십자가, 상아 조각
- 사진: 직접 촬영한 여행 기록
- 안내: 작품명과 설명은 더 메트의 현재 공식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참고 자료
The Book of Hours: A Medieval Bestseller
중세의 시간서가 어떤 기도서였으며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소개한 더 메트 공식 자료입니다.
Reliquary Shrine
장 드 투일에게 귀속되는 14세기 프랑스 성유물함의 구조와 에나멜 장식을 설명합니다.
Arm Reliquary
13세기 팔 모양 성유물함의 재료와 용도, 손에 담긴 상징을 확인할 수 있어요.
The Cloisters Cross
바다코끼리 상아로 제작된 12세기 클로이스터스 십자가의 공식 작품 페이지입니다.
Standing Female Saint
1510년 무렵 제작된 은빛 여성 성인상과 원래 성유물함에 관한 설명입니다.
Standing Bishop
여성상과 함께 전시된 작은 은제 주교상의 제작 배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